'오늘을 그리다'
있는 그대로의 만남이 좋다.
선은 그어지고 이어져 하나가 되고
색은 마음의 단어가 되어 자연이 되듯이,
서로가 나누던 간소하고 소박한 대화들을
이 곳 영천에 드리우다.
_ 2017. 영천에서
서양화가 양하윤은 작품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 간의 관계를 드러내려 한다. 회화 양식의 오랜 역사 속에서 그림은 그 안에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관계의 여러 가지 경우를 담아왔다. 예컨대 화가들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개인의 표정과 동작, 의상과 구도가 다른 인물들과 어떤 상호작용을 벌이는지 묘사하려고 애써왔다. 현대 미술이 품은 추상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재현된 인물상을 때로는 간략하게, 때로는 모호하게 표현하기 시작했다. 인물과 인물의 관계는 극단적으로는 하나의 기호처럼 제시된다. 양하윤의 회화도 이와 같은 범주에서 시도되었다. 그녀의 그림은 관계의 기호를 점 선 면 색 도형과 같은 회화 구성 요소를 화면 속에 배치하고 있다. 특히 구체적인 형상을 나타내는 그림 속 관계 묘사에서 대상들이 점유하는 구도는 추상 회화에서도 비교적 뚜렷하게 남아있다.
양하윤의 회화 또한 이러한 전형성을 가진다. 작가가 어쩌면 조망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녀의 그림이 서양 회화의 스타일이 진화해온 궤적 위에 있는 한 구간에 자신의 이력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음을 관찰한다. 20세기 미술의 주요한 한 가지 경향이 그림 속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덜어내는 것 아니었나? 양하윤도 그와 같은 일련의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그림들은 온전한 형태는 말할 것도 없고, 점과 선을 지워가고 있다.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던 수개월 전에 작가는 그처럼 거추장스러운 요소를 비우면서 남은 부분을 색으로 보충하려는 심적 상태에 놓여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나의 결과로써 우리 앞에 제시된 작품은 그런 색마저도 전체적으로 톤을 가라앉힌 이미지로 남는다.
이 과정 끝에 작품의 외형은 바로 작가가 실재의 삶이 어떠한지 우리에게 궁금증을 만드는 매개가 된다. 그림으로 표현된 그 삶 속 관계는 앙상하고 동시에 사려 깊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불안을 암시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산다는 것에 대해서 그녀가 공식적인 언술을 통해서 밝힌 것은 그렇게 양적으로 풍부하지 않다. 다만 족히 짐작이 가고, 한 개인의 특별한 일로만 볼 수 없는 게 뭔가 하면, 미술 대학 학부와 대학원을 거치면서 지금껏 그린 작품들이 자기를 진실하게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는 고백이다. 이런 성찰은 화가 지망생으로서, 또는 신인작가로서 지난 십 수 년의 시간이 방향을 잘못 잡았을 수도 있겠다는 반성이며, 그렇다면 지금 와서 무엇을 재편해야 옳은 일인지에 관한 불안을 그려내지 않을 수 없다.
이 조바심 내지 불안은 그녀의 그림 속에서 반복되는 붓질과 창백한 색조를 드러내는 동기일지도 모른다. 사실 모든 예술가들이 본인이 맞닥트린 상황을 그런 위기로 규정하면서 작업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런데 미술은, 특히 추상회화는 뚜렷하고 단정적인 보고서나 증거물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쉽게 포착되지 않으며, 간단히 평가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몰입하면 작가 양하윤이 원래 가졌을 이 세계에 대한 미적인 파악과는 엉뚱하게 멀어지는 쪽으로 향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작가는 자기가 준거된 이 세계에서 스스로 중심으로부터 소외된 지점에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사실 이건 그 어떤 예술가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며, 비슷하게 인식하는 세계관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상적(비예술적)인 관계로의 복원을 원할까, 아니면 고립된 현재를 긍정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까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측면이 있다. 주변과의 고립은 또 다른 세계와의 통로다. 미래가 보장 안 된 채 현재에 갇힌 현 시점 자체가 미래에 빛을 밝힌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한은 현재를 풍요롭게 만들고, 자신을 높이는 방편이 된다. 양하윤도 그걸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가가 되어간다.
(윤규홍, 갤러리 분도 아트디렉터/예술사회학)